
SWEET
인연이 닿고, 또 흩어지는 / 리스본
여행
월간 <SWEET>
인연이 닿고, 또 흩어지는 / 리스본




인연(因緣)이란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인연이 작용하는 방식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평생을 갈 것 같았던 인연이 작은 빌미로 한순간에 끝나기도 하고,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은 인연이 오랜 세월이 지나 우연한 계기로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인연이 닿기 위해서는 어떠한 원인(原因)이 반드시 있다고 말한다. 그 원인은 때로는 눈에 보이는 명확한 것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미천한 중생의 눈으로는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영역에 놓여 있다.
우리를 닮은 포르투갈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포르투갈 친구를 10년도 훨씬 지나서 리스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함께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가까워졌지만, 졸업 후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친구였다. 타국 학교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공을 들이지도 않았고, 소원해진 것이 특별히 아쉽지도 않았던, 딱 거기까지였던 인연이었다.
그 친구와 예전에 나누었던 소소했던 대화는 거의 잊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대화만은 언제나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관습처럼 나의 이름을 먼저 건넸을 때, 그는 자신을 ‘죠지’라고 소개했다.
“죠지? G.e.o.r.g.e?”, “아니, J.o.r.g.e. ‘호르헤’가 아니고 죠지야, 죠지.”
죠지는 묻지도 않은 부연 설명을 붙였다. ‘Jorge’의 스페인어식 발음은 ‘호르헤’이지만, 자신은 포르투갈에서 왔고 포르투갈에서는 ‘죠지’라고 발음한다고 강조했다. 죠지의 상세한 설명에서 스페인어 인구가 많은 캘리포니아에서 흔히 겪는 그의 고충이 느껴졌다. 포르투갈에서 온 죠지에게 빠르게 친밀감을 느낀 건 그때였을 것이다. 늘 강대국을 이웃으로 두어야만 했던 나라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설움과 울분 같은 것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포르투갈의 황금기
세월이 꽤 지났어도 죠지와의 재회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선 리스본은 잊어. 여기는 리스보아(Lisboa)야.”
리스보아의 도심에서 만난 죠지는 트램을 40여 분간 타고 이동해서 벨렝(Belém)이라는 지역으로 먼저 가자고 했다. 리스보아의 서부인 벨렝 지구에는 포르투갈이 가장 번성했던 시절의 흔적들이 집약되어 있다.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포르투갈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벨렝탑(Torre de Belém), 그리고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갈의 업적을 기념하는 발견기념비(Padrão dos Descobrimentos)도 있지만, 죠지가 꼭 집어 안내한 곳은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이었다.
“16세기 당시에 한 나라의 국력과 부를 과시하기에 종교 건축물만 한 건 없었거든.”
대항해 시대를 열고 황금기를 맞이한 포르투갈은 인도에서 유럽으로 들여오는 향신료 항로를 독점하며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으로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세웠다. 포르투갈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던 이 시절은 마누엘 양식(Manueline)이라는 대표적인 포르투갈 미술 양식까지 낳았다. 후기 고딕 양식을 기반으로, 스페인의 플래터레스크(Plateresque), 이슬람의 무데하르(Mudejar), 그리고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건축 양식까지 혼합된, 화려하고 정교한 마누엘 양식은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제로니무스를 잘 기억해 둬.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리스보아의 도심으로 돌아갈 거고, 수도원을 지을 때만큼의 영광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트램에 오르면서 죠지는 자학적인 농담을 웃으면서 건넸다. 도심으로 돌아오는 동안 죠지는 짧았던 포르투갈의 전성기를 들려주었다. 아프리카와 인도를 거쳐, 중국과 일본에까지 이르는 항로를 개척하며 황금기를 누렸던 포르투갈은 항로 개척을 적극 후원했던 마누엘 1세가 사망한 후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 하락세가 극단적으로 가팔라서, 결국 포르투갈은 1580년에 스페인에 병합되기에 이르렀다.
“1640년에 다시 독립하기도 하고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는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잠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도 해. 하지만 포르투갈의 국력을 꺾는 치명적인 사건이 18세기 중반에 리스보아에서 일어나게 돼.”
죠지가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우리는 카르모 수녀원(Igreja do Carmo) 앞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의 운명을 바꾼 대지진
1389년 리스보아 치아두(Chiado) 지구의 언덕 위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아름다웠던 카르모 수녀원은 리스보아를 거의 파괴했던 1755년의 대지진으로 인해 천장 등이 무너져 내렸다. 다음 해인 1756년부터 바로 재건에 들어갔지만, 1834년에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재건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폐허도 멋있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카르모 고고학 박물관(Museu Arqueológico do Carmo)이 되었다. 박물관으로 첫 문을 연 것도 160여 년 전인 1864년의 일이다.
카르모 수녀원을 나와 죠지는 한 전망대 위로 나를 안내했다. 치아두 지구보다 지대가 훨씬 낮은 바이샤(Baixa) 지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이었다. 폐허가 되어도 고풍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카르모 수녀원과 달리 해수면 높이의 낮은 바이샤 지구는 대지진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언덕이 많은 리스보아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평지인 바이샤 지구로 대피한 거야. 그런데 그때 사람들은 쓰나미를 몰랐던 거지.”
대지진 이후 40여 분 후에 바이샤를 덮친 쓰나미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당시 리스보아의 인구는 20만 명 정도였는데, 그중 15~20%에 달하는 약 3~4만 명의 사람이 대지진에 희생되었다. 치아두에 내려다보던 바이샤의 아름다운 풍경이 갑자기 다르게 보였다.
대지진 이후에 리스보아는, 그중에서도 중심지인 바이샤 지구는 빠르게 재건되었다. 이때 바이샤 지구는 이후의 맨해튼처럼 격자 형태로 반듯하게 정비되었다. 건물의 층수와 양식을 규제하고, 세계 최초로 내진설계 된 건물들이 대규모로 들어섰다. 바이샤 지구가 테주강을 만나는 지점에 있던 왕궁이 사라지고 드넓은 코메르시우 광장(Praça do Comércio)이 조성된 것도 이때였다.
“대지진 이후에도 포르투갈이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광장을 만들었던 거지. 하지만, 화려한 광장을 비롯한 막대한 재건 비용은 다시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는 크나큰 재정적인 부담이 되고 말았어. 아직도 대지진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1762년에 스페인까지 쳐들어오고 말이야.”
그리고 죠지는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묻지도 않은 질문, 하지만 내심 궁금했던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해주었다. “우리가 스페인을 딱히 싫어하는 건 아냐. 현재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좋은 이웃이야. 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헷갈리는 건 참을 수 없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언어도 역사도 문화도 완전히 다르다고!”
포르투갈의 인연, 또는 파두
바이샤 지구의 곧은 길과 코메르시우 광장의 너른 광장을 지나 우리는 알파마(Alfama) 지구의 굽은 길과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과 같은 거대한 암반 위에 자리한 알파마 지구는 대지진 때도 파괴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알파마는 지금도 미로와 같이 복잡한 골목길과 수백 년을 훌쩍 넘기는 건축물들을 간직하고 있다.
“포르투갈에서 지명 등이 ‘알(Al)’로 시작한다면 무어인들이 살았던 흔적이라고 보면 돼.”
알파마의 높은 언덕 위에 성을 쌓은 것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무어인들이었다. 12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리스보아를 되찾으면서 성은 상 죠지 성(Castelo de São Jorge)이 되었지만, 무어인들의 언어로 ‘온천’을 뜻하는 지명 ‘알파마’는 남았다.
성벽에 걸터앉아 리스보아 시내와 대서양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죠지는 물었다.
“작년에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라는 영화를 보면서 ‘인연’에 대해서 배웠어. 보면서 한국 사람들은 정말 인연이라는 것을 믿는지 궁금했거든.”
“글쎄. 한국인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아니지만, 난 포르투갈인들이 ‘파두(fado)’를 대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파두는 포르투갈어로 ‘운명’ 또는 ‘숙명’을 뜻하는 단어이자, 리스보아에서 탄생한 전통 음악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한(恨)’의 정서처럼 서글프고 애달픈 감정이 담겨 있는데, 파두 음악에는 팔자에 대한 한탄보다는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완곡한 삶의 자세가 녹아 있다고 느껴졌다.
“인연이 닿으면 감사한 일이지만, 인연이 끊겼다고 해서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어떠한 행동을 후회하진 않아.”
죠지와 헤어지면서 습관처럼 ‘언젠가 또 보자’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도 나도 알고 있다. 그 인사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서글픈 마음도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난 리스보아에서 보낸 하루를 평생 기억할 것이고, 그 기억 속에서 친구도 함께 남아있으리라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