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부산

월간 <SWEET>

우연과 인연을 찾아 떠나는 멜로 여정 / 부산

사람들은 언제 여행이 가장 간절해질까? OTT 웨이브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의 박하경에 따르면, 적어도 그녀는 그대로 살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을 때, 그래서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 떠난다. 자동차도 동행도 없이, 굉장한 액티비티나 화려한 일정도 없는 박하경의 여행은 소소하고 잔잔하기만 하다.

여행지에서 걷고, 먹고, 멍 때리는 것을 즐기는 그녀의 소박한 여행에 그래도 매번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은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 때문이다. 때론 유쾌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때론 당황스럽고 기이하기도 한 박하경의 낯선 사람들과의 인연은 소박한 여행에 독특한 맛을 더해주는 달달한 드레싱이자 톡 쏘는 소스이다.

<박하경 여행기>는 주말에 떠나는 박하경의 짧은 여행을 담고 있지만, 그만큼의 여유조차 누릴 수 없는 우리는 그녀의 여행을 지켜보며 즐기고, 누리고, 또 바라고, 꿈꾸게 된다. 많은 사람이 여행지에서 한 번쯤은 꿈꾸게 되는 인연, 그러한 소망의 정점에 3화 ‘메타멜로’가 있다. 여행지에서만 있을 법한 멜로, 어쩌면 드라마 안에서만 가능한 멜로일지도 모르지만, 매번 여행을 기대하고 설레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메타멜로는 자기 몫을 다하는 셈이다.

스쳐 간 인연, 그래도 선택은 비빔
부산국제영화제에 맞춰 부산에 내려온 박하경은 어두운 극장 안에서 낯선 남자, 이창진에게 시선이 꽂힌다. 밀면을 먹고 나오는 길에 창진과 다시 스쳐 가고,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만남이 헌책방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면 혹시 인연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기대에까지 이를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가깝게 스쳐 간 공간을 찾아 ‘대성밀냉면전문’ 식당으로 향했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낡은 간판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하경과 창진의 이야기가 더욱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이나영과 구교환을 마주치는 우연보다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메뉴는 간단했다. 냉면과 밀면, 물 또는 비빔. 우선 부산에 왔으니 당연히 밀면이었다. 어려운 결정은 그다음이었다. 이때 종업원에게 메뉴 추천을 받고서는 정반대로 주문하는 창진보다는 다른 손님들이 먹고 있는 음식을 살피며 눈치를 보는 하경이 나와 가깝다. 다행히 이번에는 눈치 볼 이유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하경도 창진도 비빔밀면을 먹었기에 나도 망설임 없이 그대로 따랐다.

먼지를 털며, 인연을 들춰보다
하경과 창진의 인연은 보수동책방골목에서 다시 이어진다. 책방골목은 실제로도 밀면 식당과 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하경은 책방 다락방 창문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창진을 발견한다. 창진이 보고 있던 책은 「사랑의 멸망」. 「춤추는 캥거루」를 찾던 하경은 결국 「사랑의 멸망」을 구매한다.

하경과 창진을 쫓아 들어간 ‘반석서점’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사랑의 멸망」이든 「춤추는 캥거루」이든, 스스로 어떤 책을 찾는다는 것은 아득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묻지 않았다. 많은 책장의 한 칸 한 칸을 살펴보다 뜻밖의 책을 만나는 것도 서점의 묘미이다. 헌책에 쌓인 먼지를 털고,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 두 손이 시커메지는 번거로운 일도 나는 은근히 즐기곤 한다.

따뜻한 조명과 아기자기한 소품들, 오래된 음반들과 해외 서적들이 쌓여 있는 모습에 끌려 바로 옆 ‘우리글방’에도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편하게 구경하라는 메모와 책을 읽을 수 있는 푹신한 소파들은 책을 파는 서점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서재에 들어온 것만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 하경과 창진이 우리글방에서 만났다면 둘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 싶은 드라마는 두 사람의 인연을 또 한 번 뒤로 미룬다.

고민 따위 연기로 날아가 버려라
서점에서 창진과 대화할 기회를 놓친 하경은 보수동책방골목을 나와 전통찻집인 ‘비비비당’으로 향한다. 다시 한번 비껴간 인연에 실망한 듯 하경은 부산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찻집에서 변한 세상을 이야기한다. 학생들은 사랑, 연애, 또한 첫사랑에 대해서 왜 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일까? 그 질문은 학생들에게 묻는다기보다 모든 사람을 향한 투정과 같다. 그 순간 하경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전화 속 누군가를 향해 ‘사랑한다고’를 반복해서 외친다. 모두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데 운명은 하경만 비껴가고 있는 것일까? 상심한 하경은 이어폰을 꽂고 음악 속으로 도망친다.

버스를 타고 책방골목에서 비비비당으로 가는 동안 찻집에 손님이 적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다면 하경이 그랬던 것처럼 바다 풍경과 따뜻한 차, 그리고 일어나지 않는 인연에 대한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착한 비비비당은 많은 손님으로 빈자리조차 찾기 쉽지 않았다. 드라마 이전에도 비비비당이 이미 핫플이었던 탓이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주방에서 끓고 있는 차에서 오르는 김과 창밖 바다를 번갈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락만 해준다면 이렇게 있다만 갈 수 있어도 아쉬움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자리를 잡고 오늘의 차를 받으니 그냥 돌아갔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하고 내 인내심을 칭찬했다. 찻집에서 느끼는 여유는 나와 다른 손님들과의 관계와는 무관했다. 손님이 많든 적든, 여유는 나와 차와의 관계에서, 나와 바다 풍경 사이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하경도 그것을 깨닫고 여유를 찾았을 것이다. 아마도.

신비롭고 아득한 달세계로
마음의 여유를 찾은 덕분인지 하경이 기다렸던 순간이 드디어 온다. 하경과 창진은 지하철역에서 다시 한번 재회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둘 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알아본 둘은 어색한 인사말도 없이 어설픈 통성명도 없이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하경과 창진은 동래복천동고분군 한쪽에 마련된 야외 상영관에서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둘은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의 1902년에 만들어진 고전영화 <달세계 여행(Le Voyage dans la Lune)>을 보며, 13분이라는 짧으면서도 긴 시간을 처음으로 함께한다.

처음으로 하경과 창진이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를 보고 웃음을 주고받는 이 공간은 둘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공간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임시로 마련된 야외 상영관이 있었던 공간은 동래복천동고분군 주차장 옆에 있는, 원래의 용도를 알 수 없는 애매하면서도 애처로운 공간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미 어둠이 잠식해 가고 있던 계단에는 관객도 스크린도 하경도 창진도 없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set)>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제시와 셀린은 비엔나에서 평생에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고 다시 보여주는 거리는 두 사람의 인연은 물론 존재조차도 의심스러울 만큼 적막하고 쓸쓸하다. 열정적이었던 사랑도 결국에 그 에너지를 다 소모하고 나면, ‘우리가 사랑하기는 했을까?’ 하고 허무함을 느끼는 감정의 결과 비슷하다. 혹시 하경과 창진의 이야기도 모두 꿈은 아니었을까,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면, 멜로도 끝나는 것일까
그 의구심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드라마도 하경도 스스로 의심하는 순간이 온다. 두 사람은 초량동의 가파른 언덕 위에 올라 부산항대교가 보이는 야경을 나란히 내려다본다. 그러다 순간 말도 없이 흔적도 없이 창진이 사라져버린다. 다시 혼자가 된 하경은 쓸쓸히 언덕을 내려오고, 감쪽같이 사라졌던 창진은 둘이 처음 동행하기 시작한 지하철역에서 갑자기 나타난다.

지하철역에서 다시 만난 하경과 창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둘은 내일 부산극장에서 다시 만나 영화를 보기로 약속한다. 헤어지기 전 창진이 사준 귤 한 봉지를 안고 호텔로 돌아온 하경은 창진과 나누었던 시간을 곱씹으며 미소를 띠기도 하고 이불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음날 창진은 약속했던 부산극장에 나오지 않는다. 뭐지? 모두 꿈이었을까? 그가 사준 귤은 이렇게 남아 있는데…

하경이 처음처럼 다시 혼자서 영화를 본 부산극장, 창진이 나타나지 않은 거리를 찾아갔다. 남포동 또는 ‘BIFF 거리’로도 불리는 광장 중심에 부산극장이 있었다. 1934년에 세워진 부산 최초의 극장이라고 하는데, 사실 지금 현재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오래된 극장의 대부분의 운명이 그렇듯 지금은 단관 극장이 아닌 멀티플렉스의 서비스와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서울의 명동과 같이 수많은 관광객과 먹거리 포장마차들로 가득한 거리에서 하경은 창진의 모습을 찾기 위해 얼마나 분주했을까. 사람이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쓸쓸한 감정이 들었을 장면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하경과 창진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인연은 다시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는 않는다. “언젠가 만나겠지. 영화는 계속되니까.” 하지만 드라마가 정말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그 뒤에 나오는 마지막 대사가 아닐까 싶었다. 창진은, 아니 구교한 배우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한다. “끝”. 이제 드라마도 여행도 다 끝났으니까, 원래 있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관객들을 깨우는 알람과도 같다.

하경과 창진의 인연은 부산에서 보낸 하루가 다였을 수도 있고, 모두가 하경이 쓴 소설 속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쪽으로든 그것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하경이 느꼈던 감정은 실재였고, 부산에서의 여행은 특별했으며, 그로서 일상을 버텨낼 힘도 조금은 더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는 사라질 사랑도 그런 거니까. 금방 끝나버리는 여행도 그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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