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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영화를 만나다
여행
출판 <길에서 영화를 만나다>
친절한 린치 씨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면서 너무너무 궁금한 게 많았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할리우드 뒷산에 실제로 있는 길이다.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할리우드 대로를 지나 점점 좁아지는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 건지 조금씩 불안해질 때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시작한다. 길은 곧 꼬불꼬불 산길로 이어지고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중심으로 둔 동네는 바로 그 아래의 번잡한 할리우드와는 완전히 달리 풍경도 집도 여유로운 모습이다. 번잡한 할리우드에서 약간만 올라왔을 뿐인데 어느덧 언덕 위에 올라서 복잡한 거리를 한가롭게 내려다볼 수 있는 게 좋다.
멀홀랜드 길이 있는 산은 메이저 영화 스튜디오들이 밀집한 할리우드와 버뱅크를 가르고 있다. 길의 어느 지점에 서면 남쪽이 보이고 그 남쪽 바로 아래로는 할리우드와 파라마운트 스튜디오가 보인다. 조금 지나니 북쪽이 훤히 보이는 지점이 나오고 그쪽에서는 디즈니, 유니버설 스튜디오,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가 보인다. 배우, 제작자, 감독 등 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이곳에 사는 이유가 너무도 분명해 보였다. 더군다나 여느 미국의 집들과 달리 높은 담과 앞뜰조차 잘 보이지 않는 폐쇄적인 건물 형태들은 유명인들이 유명세를 피하는 데 적당한 요새처럼 보였다. 잭 니콜슨이 이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게 전혀 놀랍지 않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데이비드 린치의 다른 영화들과 닮은 점이 많이 있다. (모두를 당혹시킨 <스트레이트 스토리the Straight Story>(1999)를 제외하면) 모호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 스토리 전개를 중심에 두지 않는 연출, 과거와 현재의 교묘한 공존, 익숙한 풍경들을 묘한 지점에서 뒤틀어버리는 당혹함, 기이한 사운드와 강한 색깔의 대치, 신비에 싸인 인물들. 그의 영화를 보고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적어도 그의 작품을 아끼는 사람들은 그의 영화들이 불편하게 하면서도 눈을 못 떼고 자꾸만 쳐다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럴 때면 언짢으면서도 자꾸 쳐다보게 되는 우리들의 마조히스트같은 성향이 한없이 궁금해진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그림이 떠오른 건 이 지점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데이비드 린치가 미술을 공부하던 학생 시절 숭상하던 화가다. 첫사랑의 흔적은 오래 가게 마련인가 보다. 베이컨의 영향은 그 시절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어왔다고 린치는 고백한다. 또한, 린치가 거론하는 화가에 에드워드 하퍼Edward Hopper도 있다. 에드워드 하퍼는 평범한 사람들을 평범한 미국 풍경 안에 집어넣고 그 안에서 조용히 갈라지고 소리 없이 침몰해가는 듯한 느낌들을 그려냈다. 그런 하퍼 식의 그림에 어두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괴기스럽게 그려낸 프랜시스 베이컨 식의 그림을 섞어서 영화로 찍으면 데이비드 린치 영화와 비슷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데이비드 린치는 왜 미술 쪽으로 공부를 하다 영화 쪽으로 전향했을까? 그 이유의 진실을 캐기 위해서는 그가 미술 공부를 하던 1970년대 전후의 미술계 풍경을 다 공부해야만 할 판이다. 다만 60년대부터 백남준 씨를 포함하여 많은 미술인이 비디오라는 새로운 미디엄을 경계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디엄을 통해 전통적인 미디엄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면 린치의 선택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향’이라는 급진적인 단어를 쓰긴 했지만, 스위치를 켜고 끄듯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니었다. 전향이란 말이 굳이 사용되어야 한다면 그건 그의 작품세계의 변화라기보다는 단순한 미디엄의 변화에 제한되어야 할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가 카메라 대신 여전히 붓을 들고 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 당혹감, 기이함, 신비함을 그리는 화가였을 것이다.